영탑사이야기

보물 제 409호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

 8각형의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三尊佛) 구도이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사각형의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되어 보인다. 상반신은 길고 큼직한 데 비하여 하반신이 무척 위축되어 있어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도 상반신에 비하여 낮아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가슴 역시 평면적이며 하반신 처리는 둔중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이다. 손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양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보살과 오른쪽 보살은 모두 같은 자세에 똑같은 수법을 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은 따로 만든 것이며, 그 안에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길게 어깨까지 내려온다. 얼굴은 본존불과 기본적으로는 같으나 좀더 여성다우며, 가슴의 목걸이 장식은 유난히 크다. 잘록한 허리에 둘러진 천의(天衣)는 몇 가닥 띠로 허리를 잔뜩 졸라 맨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보살들의 대좌(臺座)는 본존불의 대좌에서 나온 두 개의 연꽃 줄기가 올라가서 만든 연꽃 봉오리이다.
 이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약사여래불 (충남유형문화재 제111호)

 암벽에 돋을새김한 높이 3.5m의 불상이다. 고려말에 무학대사가 사찰을 둘러보니 기이한 바위가 빛을 내고 있어 심상치 않게 여겨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머리에는 상투모양의 머리묶음을 표현하였고, 얼굴은 윗 부분이 넓고 밑 부분이 갸름한 형상이며 신체에 비해 큰 편이다. 눈.코.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세련미는 부족하나 친근함이 드러나는 이런 형태의 얼굴은 고려시대부터 유행하던 충청도 지방의 일반적인 불상 양식이다.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뤄준다’는 지역의 대표적인 약사여래불상이다.
 

칠층석탑 (문화재자료 제216호)

 이 탑은 1798년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 보수때 그 뒤 바위에서 5층 탑을 세웠고 그 탑을 기리어 영탑사란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1937년 당진 교육회 발행 (당진군사)에 있다. 또한 동네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 짐작하면 대원군이 자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하여 덕산 가야사의 금탑을 불지르고 부셨다. 그때 가야사 스님들이 산길로 약 삼십리 밖에 안되는 영탑사로 금동 삼존불, 가야사 법당 금종을 옮겨왔고, 그 뒤 부서진 가야사 금탑도 옮겨 왔을 것이란 짐작을 해보나 확실치 않다. 
 탑과 자연석이 만나는 부분을 보면 기단부는 없고 1층 탑신이 자연석 위에 직접 놓여져 있고 서로 만나는 부분이 어긋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탑은 이 곳에 세우려고 조성한 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세웠다가 6,7층이 부서져서 못 쓰게 된 탑을 옮겨 왔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범 종 (문화재자료 제 219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60㎝, 입 지름 46㎝의 종이다.
 이 종에는 조선 영조 37년(1760) 가야사 법당에 있는 금종을 녹여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덕산,홍주,면천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다. 
 가야사는 이 절자리가 왕을 낳게 한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현종 6년(1840)에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 남연군(1788-1836)의 무덤을 썼다. 
 어떤 경로로 그 절의 금종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